칼럼

대한민국이라는 회사의 인사부서가 드리는 이야기

신경수의 사람人 이야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전하는 인간 신경수의 이야기.
CEO 신경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리더십 전문가이다.
마케팅을 공부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우연히 듣게 된 허츠버그의 '동기부여이론'에 매료되어 진로를 HR로 바꾸었다.
1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조직과 사람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인스파트너의 대표로서 한국의 많은 기업체에 조직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다.

제목 실패를 대비한 플랜 B는 정말 필요한 것일까
등록인 신경수 등록일 2017.01.24
신경수의 사람人 이야기
160번째 이야기 「실패를 대비한 플랜 B는 정말 필요한 것일까」


지난 주말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탄금대라는 곳을 다녀왔다. 탄금대는 조선중기의 명장 신립장군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일본군 제1진의 선봉대장인 고니시 유끼나가(少西行長)의 군대를 앞에 두고 8천의 결사대로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곳으로 명승 제42호로 지정된 곳이다. 대문산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수려한 자연 경관과 역사적 대서사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신립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시호는 충장(充壯)으로 1546년 명종 1년에 출생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함경북도 온성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북방 국경선을 침범해 온 여진족 이탕개의 1만 군사를 격퇴한 공로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무공을 높이 인정한 유성룡의 추천으로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충주로 내려가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그 방어선이 바로 탄금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립의 8천 군대는 조총으로 무장한 고니시의 제1진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여 전원 몰살당하였고, 신립은 적군 수십명의 목을 벤 후, 부하장수 김여물과 함께 탄금강에 투신하여 자결하게 된다. 방어선 탄금강이 무너지자 선조는 곧바로 신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오랜 전쟁이 끝나고 조정은 그의 충절을 높이 기려 충장이라는 시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영의정에 봉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립장군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듯 하다. 신립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비판론과 펼쳐보지도 못한 용맹을 안타까워하는 동정론이다. 신립이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 천혜의 자연요새인 문경세재를 버리고 퇴로가 없는 탄금강을 택하는 바람에 8천의 군사가 몰살 당했다고 주장하는 비판론과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2만의 군대 앞에서 그 누가 싸웠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동정론이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뒤로하고, 신립은 왜 문경세재를 버리고 탄금강을 선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일치하는데, 첫 번째는 신립장군이 워낙 기병전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북방영토를 누비며 여진족과의 전투에 익숙해 있는 신립에게 조령산맥을 활용하여 매복전을 펼치는 전투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두 번째는,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직감한 신립이 ‘배수의 진’을 치기 위해 탄금강을 선택했다는 설이다.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2만의 일본군을 앞에 두고 전세의 불리함을 느낀 신립이 퇴로가 없는 이곳 탄금강을 방어선으로 취함으로써 살아서는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병사들에게 보이고자 했다는 설이다. 마치 타고 온 배를 불태움으로써 전쟁에서 이기는 길 이외에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인 진(秦)나라 말기 항우장군의 일화를 담은 고사성어 파부침주(破釜沈舟)를 연상케 만드는 전법이다.

'타고 온 배를 태우고 밥을 지어 먹을 솥을 깨트린' 항우의 부대는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하여  마침내 진나라의 주력부대를 궤멸시켰다고 전해지는데...... 병법에 능한 신립장군이 이런 성공스토리를 꿈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선택한 '배수의 진'은 결국 참담한 새드엔딩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구비구비 흐르는 탄금강을 바라보며 혹시나 전투에서 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목선 몇 척이라도 준비해 두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일상으로 돌아오고 몇 일이 지났다. 신립이라는 이름과 탄금강전투가 잊혀져 갈 무렵,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재호(가명)가 찾아왔다. 재호는 오래 전에, 내가 경희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았을 때 알게 되었던 제자로 지금까지도 그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매우 스마트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다. 국내 모 대기업의 재무팀에서 일하면서 주말에는 GMAT(미국 MBA입학자격시험)공부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매우 성실한 청년이기도 하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그냥 인사차 들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재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교수님 저 회사 그만둘까 합니다" "아니 왜?" "회사 다니면서 공부를 하려니 원하는 점수는 나오지 않고 계속 제자리 걸음이네요. 뭔가 '배수의 진'을 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회사에 사표를 내고 공부에만 전념할까 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좋은 직장을 때려 친다고 하는데 당연히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오랜 동안 준비해 온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출사표를 던지겠다고 말하는 재호의 얼굴에서 전쟁에 임하는 장수의 결연한 의지가 보였기 때문에 쉽사리 만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 지난 주 다녀왔던 탄금강이 생각났다.

"재호야, 너 신립장군의 '탄금대전투'라고 들어봤니?" "잘 알지요, 제 고향이 충주잖아요. 임진왜란 때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선인데, 조총에 밀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8천의 군사가 몰살당한 치욕적인 전투로 알고 있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옳지 잘 되었다 싶어 퇴로를 차단한 신립장군의 '배수의 진' 때문에 얼마나 많은 병사가 값어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예로 들면서 혹시나 있을 지 모를 실패에 대비하여 확실히 입학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휴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해 보았다.

"신립장군과 같은 실패사례도 있지만, 반대로 같은 시기에 있었던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과 같은 성공사례도 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사분위기상 휴직은 불가능해요. 지금처럼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하던지 아니면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만 두고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를 하면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교수님도 예전에 저한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주변 것들은 버리고 그것만 생각하라'고 하셨잖아요. 이순신 장군처럼 '生卽死 死卽生'의 각오로 공부에 임할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저것 곁눈질 안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그것에만 올인 한다는 것은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미션을 수행함에 있어서 플랜 A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는 오히려 미션의 성공확률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도 나와있는데, 다음은 "Making a backup plan undermines performance"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미국 위스콘신대 경영대학원의 신지혜 교수의 말이다.

"대안 만들기가 성과를 약화시킨다는 것이 우리가 세운 가설이다. 이 가설은 시간을 줄여준다거나 돈을 준다든지 하는 다른 보상을 제공한 후속 실험들에서도 사실임이 입증이 되었다. 우리는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운이 아닌 노력이 필요할 때, 플랜 B가 목표를 향한 열망을 감소시켜 성과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플랜 A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생각한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열정과 동기부여가 부족했던 탓에 노력을 덜 기울였고 대안을 고려치 않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출처: HBR September 2016)

더 이상 퇴로가 없다고 생각할 때 무서운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가지 궁금증이 일어날 것이다. 신립은 왜 '배수의 진'을 친 탄금강에서 대패를 하고 이순신은 어떻게 명량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맞이하여 승리를 거둔 것일까? 숫적 열세로 본다면 이순신의 해군이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능력의 차'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립의 지상군은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한 후,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이후에도 익숙해 있는 평야전투를 포기하지 않은 반면에, 이순신의 해군은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1:1 싸움을 피하고 지형지물을 활용한 게릴라전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울돌목으로 적군을 유인한 것이나 가장 물살이 쌘 날을 골라 싸움을 벌인 점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퇴로는 없었지만 변화된 환경에 대한 대처능력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퇴로를 차단하고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우기는 재호에게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신지혜 교수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패를 대비하여 차선책을 마련해 두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혹시나 모를 실패에 대한 리스크헷지적인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양다리 걸치기는 어느 정도까지는 진전이 있어 보이기는 하겠지만 임계점을 넘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나는 1달 정도 시간을 갖고 고민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조언자의 입장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민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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