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한민국이라는 회사의 인사부서가 드리는 이야기

신경수의 사람人 이야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전하는 인간 신경수의 이야기.
CEO 신경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리더십 전문가이다.
마케팅을 공부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우연히 듣게 된 허츠버그의 '동기부여이론'에 매료되어 진로를 HR로 바꾸었다.
1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조직과 사람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인스파트너의 대표로서 한국의 많은 기업체에 조직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다.

제목 과잉배려
등록인 신경수 등록일 2015.09.10

조용하던 기차 안이 사내아이 두 명이 타면서 분위기가 180도 바뀌게 된다. 조용히 독서를 즐기던 할아버지, 공부를 하고 있던 학생들, 잠든 아이를 다독이던 젊은 아낙네를 포함하여 그 차량에 승차해 있던 승객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본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처럼 보이는 사내아이들은 남들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목에 빨간 망토를 걸친 채 슈퍼맨 놀이에 빠져 있다.

 

아이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조용히 아이들의 아빠에게로 향한다. 사실 아이들만 기차에 승선한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만 기차에 탓을 리가 없다. 당연히 부모 중에 누군가가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에 올랐을 텐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정도로 아이의 아빠는 존재감이 없었다. 사람들 눈에 아이의 아빠는 눈에는 보이지만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움직임에 생기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은 이내 아이의 아빠에게 모든 눈총을 보냈다. “제발 아이들을 어떻게 좀 해 보세요!”라고 무언의 애원을 보냈다. 하지만 아이의 아빠는 수십 개, 수백 개 불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릎에 얼굴을 파 뭍은 채 거의 1시간을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보내고 있었다. 가끔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보면 흐느껴 우는 듯한 인상도 풍기면서…….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참다 못한 어느 중년의 신사가 아이의 아빠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너무 심하게 떠드는 것 같습니다. 승객들이 몹시 불편해 하니 아이들에게 주의를 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순간, 아이들의 아빠가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한다. “저 아이들의 엄마가 조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지금 아내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 이 글을 지어 낸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유럽으로 알려져 있어 심리학이 발달한 유럽에서 최초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해 볼 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모르는 고통이나 슬픔을 안고 있다. 그러니 최대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라는 메시지를 풍기면서 치유심리학의 저변확대를 위해 자주 인용되는 글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만만치 않게 많다. 나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슬픔 때문에 다른 승객들이 느끼는 고통은 외면해도 상관없는가? 하는 문제와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이들의 잘못은 바로잡아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같은 열차에 승선한 승객이라면, 그리고 아이들의 아빠로부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은 중년의 신사라면 어떤 마음이 생기겠는가? ‘이런 줄도 모르고 아이들의 아빠를 탓한 것에 대한 미안함 or 그래도 다수를 위한 공공교육이 우선이다어느 쪽에 가까울까?

 

사실 이 화두를 던져 본 이유가 있다. 지난 주 어느 모임의 아침 조찬에 갔다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것이다. 아침 7부터 진행하는 조찬은 일과시간 이외의 시간을 활용하여 공부를 한다는 뿌듯함과 짧은 시간에 여러 사람을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작용하여 대기업 임원이나 중소기업 사장들이 즐겨 이용하는 스터디모임 중의 하나이다.

 

들어오는 모습부터가 특이했던 분이 한 분 있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한다 점 때문에 대부분이 혼자서 프리하게 개별적으로 입장을 하는데, 그 분은 아직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둘을 양 손에 잡은 채 강의장에 들어 선 것이다. 처음 접해 보는 생소한 모습이라 신기한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아마도 사모님이 안 계시거나 유치원이 휴업이라서 아이들을 돌 볼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겠거니, 생각하며 이내 그 아빠와 아이들을 머리 속에서 지우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데 강의실 뒤 편에서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에 신기한풍경을 연출해 주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난리가 아니었다. 최대한 집중을 하려 노력했던 강사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잠시 강의를 중단하고 아이 아빠에게 어떻게 좀 해 주세요!”라는 표정의 무언의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건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그러도록 내버려 두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앞장의 사례에서 나오는 기차 속의 아이들 아빠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강의실에 앉아 있는 수십 명의 사회 지도층 오피니언 리더들 모두가 쳐다보는데도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던 지라 행사가 끝나고 모임을 주관한 사회자께 여쭤보았다. “아까 그 분, 혹시 집안에 갑자기 무슨 큰 일 당하신 것 아닐까요?” “!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서로 아시는 사이도 아니실 텐데^^;” “뭔가 큰 우환이 있지 않고서야 사람들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해 있는데 그렇게 모른 척 할 리가 없지 않겠어요

 

개인적인 가정사인지라 그 분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분이 처한 개인적인 사유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고통이 정당화되어도 상관없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그 분이 안고 있는 정신적 고통과 슬픔을 알았다고 치자! 상황이 이해되었으니 참고 그냥 강의를 경청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건 당신 사정이니 모두를 위해서 잠시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정중히 요청을 할까?

 

최근 우리 사회에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지나치리만큼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여 입을 닫아 버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직장 내에서도 발생한다. 지나친 배려가 모두를 힘들게 한다고 말하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몇 년 전에 논문을 쓰는데 도와달라는 후배의 부탁을 받고 주변의 HR담당자들의 협조를 얻어 수집한 결과이다.

 

 

국내 100대 기업에 재직중인 일반 직장인 129(2010), 157(2013)을 대상으로 한 조사의 결과를 보면 동료에게서 느끼는 정신적 피로도가 201048%에서 201359%로 증가한 사실이 눈에 띈다. 추측하건 데 배려라는 사회적 무드가 확산되면서 혹시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을 닫아 버리는 데서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이다. 여기서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적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 우리 모두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이익이 아닐까? 소수입장에 대한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다수가 속해있는 공동체 멤버들에게 불편을 안기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건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나 나의 배려로 인해 내가 속한 공동체의 가치가 훼손되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